유리 바자 7월호 :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유리'도 반짝반짝 빛났지만 이제 막 배우로서 비상하기 시작한 '권유리'는 다른 색깔로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다. 익숙한 무대에서 내려와 또 다른 도전에 두발을 디딘 권유리. 이번엔 아홉이 아닌 혼자다. #YURI #GirlsGeneration #HarpersBazaar #Bazaar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직전, 나는 권유리에게 '배우로서의 그녀'를 찍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 하지만 그건 무대 위에서 아홉 명이 한 몸인 양 움직이던 소녀에서 혼자가 됐을 때 그 힘이 부족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일명 '연기돌'에 대한 편견이 섞인 완벽한 '기우'였다. 촬영 내내 "난 소녀시대가 아니야. 난 여배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다 뭉클했으니 말이다. 묘한 눈을 가진 이 아가씨는 도발적이면서도 무료하고, 고혹적인 극단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다가 카메라가 멈추면 까르르 웃는 소녀로 돌아갔다. "화보 촬영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스케줄 중 하나예요. 주근깨가 도드라지거나 순간의 어색한 표정 같은, 예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게 재미있어요." 반쯤 눈을 감은 어색한 '굴욕 컷'을 두고 시원스레 웃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망가지거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제 막 소녀시대에서 빠져나와 '유리'에서 배우 '권유리'로 홀로 선 그녀가 드라마 '패션왕'에 처음부터 덜컥 주연으로 출연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수많은 아이돌이 연기에 도전장을 내고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생겨나는 '연기돌 바람' 시대에 그들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잣대에 올라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대중은 익숙한 얼굴의 낯선 포지션에 대해 몇 배는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혹독한 비판을 던진다. 그것도 지금 아이돌 열풍의 중심에 있는, 전 세계를 누비는 소녀시대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아 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더라면 차라리 쉬웠을 것 같아요. 어쨌거나 저는 가수니까, 무대나 스태프를 대하는 태도나 카메라가 익숙하잖아요. 하지만 드라마 촬영 현장은 완전히 낯설지도, 그렇다고 친근하지도 않은 곳이었어요. 소녀시대 이름에 거는 기대치가 있으니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런 걸 모두 내려놓는다는 게 어려웠는데 사실 그게 맞는 거잖아요." 무지에서 비롯되는 무모한 용기도, 든든한 경험도 없는 그녀에게는 분명히 어려운 첫걸음이었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는 일이야 다른 신인에 비해 더 쉬울지 몰라도 진짜 '배우'로의 진입장벽은 더 높은 법. "가수 데뷔하기 전부터 늘 연기가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공도 연극을 선택했고요. 너무 오랫동안 원한 일이었기에 오히려 자꾸 빗겨 나가는 것만 같고, 생각하는 만큼 표현이 잘 안됐을 때 더 속상했어요. 여건상 시간이 부족해서 캐릭터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하기 전에 일차적인 것들, 빨리 대사를 외워야 하고 당장 촬영을 해야 했는데, 그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으니 맘대로 안 되어 안타까웠죠." 말 한마디, 단어 하나를 또박또박, 꼭꼭 씹어가며 말하는 얼굴엔 그녀가 이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간절히 원했고 고민했는지, 그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일찍이 아홉 명의 소녀시대 멤버와 함께 활동해 왔던 그녀는 동료와 함께 작업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유익함을 늘 경험해 왔다. 그녀가 익숙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끝내 최안나로 서울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은 '패션왕'에 등장한 동료 배우들과의 교감 덕이 컸다. 어딜 가든 돋보여야 한다는 배우들의 태생적인 본능을 내세우는 대신 그녀는 비슷한 나이의 혹은 더 어린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고 모르거나 확신이 없을 때는 주저 않고 물었다.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신 선배라면 훨씬 쉬웠을 텐데 또래이기 때문에 더 어려웠어요. 그래도 제가 먼저 다가가니까 오히려 동료들이 더 열정적으로 도와주더라고요. 전 연기의 기술적인 부분보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풀어가는 게 맞는 건지가 더 궁금했어요. 그랬더니 (유)아인 오빠도 자기 내면에 있는 걸 표현할 때 희열을 느끼고 해소가 된대요. 왜, (유)아인 오빠가 연기한 캐릭터는 모두 솔직하고 소신 있고, 그런 느낌이 좀 있잖아요."
어쩌면 권유리가 자신의 말대로 대사 어두에서 어미까지 완벽하게 처리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때로는 헤매고 있을 때조차 혼란을 받아들이고 내려놓을 줄 아는 여자다. "하정우 오빠가 학교 선배세요. 조언해주시길, 당장에 어떤 것을 얻겠다, 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냥 배워가는 과정으로 여기라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이 한 작품을 끝내는 것만으로도 너한테는 엄청나게 큰 경험이고 배움일 테니까 그냥 그 호흡을 즐기라고. 끝나고 나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확 와닿았어요."
물론 그녀도 처음엔 캐릭터를 무조건 분석하려 했다. "습관, 성격, 세세하게 다 파헤치려고 들었어요. 제가 최안나를 자꾸 만들어가다 보니까 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설정을 하게 되고, 가짜 말투와 가짜 손짓, 가짜 눈빛을 보내게 되면서 자꾸 다른 생각이 드는 거죠.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난 자꾸 슬프다, 슬프다, 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어요." 동료들과 함께, 때로는 홀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그녀는 결국 최안나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최안나는 초라한 과거를 딛고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캐릭터임과 동시에 주어진 일은 반드시 해내고 싶어 하고 사랑에 버림받아도 결코 굴하지 않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과 많이 닮아 있는 인물이다. 단순히 '도시적인 여성'이라는 표면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히스토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서부터 그녀의 최안나는 다시 출발한 것이다. "소녀시대의 유리는 늘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지만 사실 인간 권유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고민도, 노력도 많이 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긴 연습생 시절 동안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내일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겠지,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게 내 몫이겠거니 하고 또 달려갔어요. 최안나도 그래요. 사랑에 버림받아도 다음날이면 다시 일어나고, 일에서 실패하더라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하는 경우, 이미지를 비슷하게 이어가는 다른 이들에 비해 그녀의 선택은 과감하고 당돌한 면이 있었다. 건강하고 시원스러운 웃음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녀라면 밝고 싱그러운 캐릭터가 소화하기도 쉬웠을 텐데 왜 굳이 처음부터 화려하지만 우울한 성향의 최안나를 선택한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소녀시대의 유리와 배우 권유리를 떨어트려놓고 싶었어요. 이제껏 보여줬던, '저다운' 캐릭터보다 좀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제안에 있는 여러 가지 모습 중에 이제껏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다른 부분을 꺼내고 싶었던 거죠. 나의 첫 번째 명제는 그저'소녀시대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였어요." 어찌 됐든 나는 '패션왕'을 보는 내내 최안나에게서 소녀시대의 유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발끝에 힘을 주고 걷는 모습, 도도하고 새침한 표정과 말투,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부들부들 떨어가며 눈물을 참을 때에도, 사랑을 잃고 신경안정제를 삼키는 신에서도 생기 넘치고 발랄한 소녀, 무대 위의 '유리'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 말을 유심히 듣던 그녀가 일차적인 목표는 성공했다며 좋아하더니 특유의 노래를 부르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그래도 다음엔 좀 더 밝고, 잘 웃고, 애교도 막 부리고, 사랑받는 캐릭터를 맡았으면 좋겠어요. 무조건!"
권유리는 씩씩하다. 무슨 질문을 던져도 왜곡하는 법이 없다. 민감한 얘기도 명랑하게 풀어놓을 줄 알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감추지 않는 사람만의 명쾌함과 산뜻한 자신감은 현장에서도 그대로 표현했다. 유쾌한 농담을 툭툭 던지고, 사진가에게 와서 대뜸 "저랑 취향이 잘 맞으시는 것 같아요!"라며 생명력 넘치는 건 몸과 마음이 태생적으로 건강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이 제일 예쁘잖아요. 운동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여행을 가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예요. 몸과 마음은 다 연결돼 있어서 마음이 튼튼해지면 자연스럽게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특히 일하고는 별개로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쉬는 시간엔 그냥 막 놀아요. 요가도 하고 수영도 하고, 최근에는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승마, 복싱, 킥복싱, 검술 다해요.(웃음)"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만큼 우린 앞으로 더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는 권유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삶과 일을 정확하게 구분 지어놓고 유연하게 오가는 건강한 삶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그 시간이 모이다 보면 고유의 자신이 되고 얼굴과 말투, 제스처에 그 사람의 인생과 철학이 배어 나오기 마련이다. "제가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를 보면 그냥 이목구비가 예쁜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의 흔적이 아름다운 거더라고요. 분위기라든지 단어 선택이라든지 아주 사소한 것 하나부터 끝까지 그'사람' 자체가요." 그녀는 그것을 차근차근 쌓고 숙성시키고 있는 듯 보였다. "전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꾸밈없는 사람, 순수하고 건강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옷을 입으면 이런 대로, 저 옷을 입으면 저런 대로 매력이 있는 의외성 짙은 사람. 제가 그런 사람이 되면 자연히 그런 배우가 될 수 있겠죠?" 누군가는 아이돌을 인형에 비유하겠지만, 적어도 권유리는 아니다. 마냥 활기차고 천진한 스물네 살 여자를 상상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연기라는 새로운 과제를 누구보다 진중하고 간절하게 풀어나가는 여자였다. 조바심을 내는 일은 없다. 그녀는 유유히 꿈을 완성해 나갈 것이고, 권유리라는 배우를 한 명 더 얻은 건 우리에게도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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